살면서 갑자기 불안해질 때가 있다. 삶이 막막하고, 갈피를 못 잡을 때가 있다. 아마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할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산책을 한다. 산책을 하면 생각을 정리할 수 있고, 가볍게 환기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에 산책으로 끝나지 않을만큼 마음이 무겁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잠깐의 고민이나 불안이 아니라, 인생의 전반을 걸쳐 온 거대한 고민이나 불안이라면 어떨까? 그에 대한 답은 '와일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와일드'의 여자 주인공인 셰릴(리즈 위더스푼 분)은 PCT(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에 나선다. 즉, 멕시코부터 캐나다까지 이어지는 4300KM의 횡단 여행을 떠난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400-500KM인 걸 생각할 때, 4300KM의 거대함을 느낄 수 있다.
셰릴이 이렇게 길고 험난한 길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는 이에 대해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녀가 엄청난 고민의 무게를 떠안고 이 길을 나섰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녀의 과거 이야기가 조금씩 드러난다. 그 안에서 셰릴이 안고 있던 무게감이 얼마나 컸는지 느낄 수 있다.
4300km라는 거리. 자전거를 타고 가도 무척 힘든 거리이다. 자동차를 타더라도 무척 긴 거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셰릴은 성인 남자도 들지 못할 정도로 무거운 배낭을 메고, 그 먼 길을 떠난다. 제대로 된 식량도 없고, 제대로 된 거주지도 없는데 무작정 떠난다. 길 위에서 2분에 한번 포기의 유혹에 빠지지만 그럼에도 걷는다.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는 두렵다. 호의를 갖고 그녀를 도우려는 사람도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된다. 또한 세상에는 호의만 가득한 게 아니다.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도 있다. 야생에서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어떠한 제도나 장치가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배낭과 자신뿐이다. 그렇게 두려운 가운데에서도 그녀는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수많은 시간이 지나고나서 종착지에 들어와서 그녀는 무슨 깨달음을 얻었을까? 영화를 보고서 나는 간접적으로 그녀의 깨달음에 동참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깨달음은 미지의 영역이다. 그나마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건 바로 영화 제목에 있다. 와일드라는 건 그녀가 긴 세월 동안 걸었던 PCT일수도 있고, 혹은 그녀가 지난 더 오랜 세월 동안 걸어왔던 자신의 인생일 수도 있다.
영화를 보고서 나 자신의 삶도 많이 돌아보게 됐다. 내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한 순간 한 순간 거대한 배낭을 메고 걸어가듯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가, 아니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았는가. 셰릴 스트레이드의 실제 경험을 담은 책을 바탕으로 영화는 만들어졌다. 그녀가 실제로 겪은 삶을 보며 많은 반성을 하게 됐다. 하지만 반성이라는 건 그저 뒤를 돌아보고 만다면 후회일 뿐이다. 그게 반성이 되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본 뒤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다시 앞을 마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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